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오폴드 2세 (문단 편집) === 말년과 죽음 === 물론 과장된 소문도 있으나 콩고에서 잔혹한 일들이 일어난 것은 엄연한 사실이었고, 소름 끼치도록 야만적인 일들이 콩고에서 자행되었다는 증거들은 넘쳐 흐를 정도로 많았으며 콩고에서는 무고한 사람들이 혹사당하고 유럽인 관리관들에게 자신들의 이윤을 남기기 위하여 죽임을 당하고 있었다. 당시 국회에 보고된 보고서에 따르면 1885년 콩고 독립국이 출범한 이후 콩고의 인구는 3000만에서 900만 명으로 70% 감소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물론 이 수치는 당시 나온 수치이므로 신빙성이 떨어진다. 사실 당대의 인구 통계를 조금만 안다면 신빙성이 적은 정도가 아니라 허무맹랑한 수준의 수치다. 콩고가 당시 인구 3000만, 즉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인구 대국이었다는 건 신빙성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당대의 통계에서 학살 규모가 허무맹랑한 수준으로 부풀려진 것은 시대상의 한계 때문에 통계 자체도 신빙성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정보 전달 속도도 빠르지도 않았다는 점과 레오폴드로부터 콩고의 이권을 뺏어 오기 위해 레오폴드의 정적들이 레오폴드의 과오를 강조하기 위해 통계를 부풀린 것에서 기인했을 확률이 높다.] 이로써 레오폴드 2세가 수년간 주장한 인도주의적 관계와 문명화의 목적이 드러났고, 콩고 독립국에서 자행된 잔인한 [[학살]]과 학대에 대한 기소가 준비되었다. 레오폴드 2세는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로 인해서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고 하며, 자신을 향한 비난이 전 세계적으로 급격하게 퍼져나가는 이유를 [[영국]]의 계략이라고 믿었다는 거다. 그는 영국의 국왕 [[에드워드 7세]]가 질투심 때문에 콩고 독립국과 자신의 인생과 노력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악의적으로 이런 모든 일들을 계획했다는 괴상한 생각을 가졌다. 특히 1903년 캐즈먼트가 콩고로 파견된 것을 보고 자신에 대한 비판이 영국의 음모라는 생각이 더욱 확신으로 굳어졌다고 한다. 사실 이 소리도 [[망언]]에 불과한데 정작 영국보다는 [[덴마크 왕국]]의 [[프레데리크 8세]], [[크리스티안 10세|크리스티안 왕세자]]가 레오폴드 2세를 야멸차게 비난했다. 게다가 이 두 사람은 평생 동안 [[노예제]]를 극도로 혐오했기 때문에 다른 [[제국주의]] 국가의 군주들보다 명분도 확실했다. 그 때까지 벨기에 정부는 콩고에 대해서 관여하지 않고 있었으나 콩고에서 벌어진 착취와 학대가 너무나도 끔찍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벨기에 정부도 이를 방관할 수만은 없었다. 콩고를 벨기에로 합병하자는 주장이 나왔고 국회는 이 방법을 채택했다. 정부는 레오폴드가 그냥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였고, 레오폴드 2세의 콩고 자유국을 빼앗아 오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1906년 국회에서 콩고를 완전히 합병시키기 위해서 우선 콩고 합병에 대한 합법 초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레오폴드 2세는 이에 대해서 노발대발하며 "콩고에 관한 나의 권력은 절대로 분산될 수 없다"고 말하면서 "콩고는 나의 노력의 산물이다. 콩고의 적들이 합병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정권을 바꾸어 현재 진행되고 있는 모든 일들을 방해하고 자신들이 그 이익을 챙겨 부자가 되려는 것이 그들의 전략이다."라고 공표했다. 게다가 벨기에 [[국회]]를 과소평가한 나머지 어느 정도 협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막 나가는 방식을 선택했고, 콩고에서의 학대 행위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자 '레오폴드 2세는 국회와 정부의 합법적인 절차를 무시하는 [[폭군]] 또는 [[독재자]]'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그에 대한 민심이 서서히 나빠지기 시작했다. 그러자 국회는 4개월 후 비슷한 논의를 시작했고, 레오폴드와의 갈등은 지속되었다. 그런데 1906년 12월 13일, 레오폴드 2세는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벨기에와 콩고의 합병을 지지하며 합병이 성사되기를 바란다"고 주장했다. 레오폴드의 갑작스러운 입장 변경은 "곧 [[미국]]이 콩고 일에 관여할 것"이라는 소식 때문이었다. 레오폴드 2세는 언제나 미국의 입장을 중요시해서 자신의 인도주의적인 입장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니엘 구겐하임(Daniel Guggenheim)[* [[솔로몬 R. 구겐하임 미술관]]의 설립자로 유명한 [[솔로몬 R. 구겐하임]]과 [[타이타닉호 침몰 사고]]의 희생자 중 한 명인 벤자민 구겐하임의 형이다.]과 같은 미국의 백만장자들을 초청했고 콩고 독립국 중남부에 있는 카사이 강 입구에 100만 헥타르 이상의 토지를 개발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사업에 투자를 유치했다. 레오폴드는 이런 개발로 콩고의 외국 회사들이 부를 축적하게 되면 외국 회사들, 특히 [[미국]] 회사들에 투자한 자신이 콩고의 통화 공급량을 통제할 수 있게 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만약에 미국이 다른 [[유럽]] 국가들의 편을 들어 주게 될 경우 이 개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콩고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영국]]과 [[독일]]은 그에게 등을 돌린 상태였고 미국인들마저 콩고에서의 잔악 행위로 결국 레오폴드 2세에게 등을 돌렸다. 이런 지루한 공방전 끝에 마침내 1906년 12월 14일, 벨기에 총리인 스메트 더 나이여르 남작 파울 요제프는 벨기에와 콩고가 합병되었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레오폴드 2세는 한동안 자신이 아직도 콩고의 지배자라는 환상에 빠져 있었지만 1908년 10월 18일 권리 양도 협정에 서명을 하도록 강요 받으면서 그의 환상은 깨졌다. 그리고 콩고는 마침내 레오폴드 2세의 폭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레오폴드 2세는 1908년 콩고 독립국을 벨기에 정부 소유로 맡기고 물러났다. 문제는 회계 자료도 안 내놓고 이미 많은 돈을 애인 카롤린에게 주거나 공사하는 데 써 버려서 벨기에 정부는 1908년 콩고 독립국의 빚까지 부담하면서 인수했고 이로 인해 벨기에 내에서도 엄청나게 평가가 나빠졌다. 그 이후에 [[콩고민주공화국]] 쪽의 상황은 그나마 잠잠해졌지만 벨기에 정부 소유가 되어도 사람들의 고통은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왜냐하면 [[벨기에 왕국]]은 전형적인 [[제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 시기의 유럽 국가들은 전부 [[인종주의]]에 젖어 있었고 강대국이면 죄다 [[제국주의]] 국가였다. 단지 레오폴드 2세는 그들 가운데서도 특히 심했을 뿐이다.] 여전히 원주민들을 강제노동시켜서 고무를 얻어냈고 콩고 독립국의 관리들도 전부 레오폴드 2세 밑에 있다가 벨기에 정부 소속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다만 한 번도 콩고에 가 보지 않은 레오폴드 2세와는 달리 새로 왕위에 오른 [[알베르 1세]]는 콩고도 방문하고 손이 잘린 사람들도 직접 만나서 처우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약속은 어쨌건 실천되긴 했다. 노동과 착취는 여전했지만, 손목 절단도 사라지고 강제노동 대신 세금을 거두었다. 게다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광산을 개발하면서 조금 나아졌을 뿐, 다시 가족을 인질로 잡고 노동을 시키는 것이 반복되었고 손은 안 자르지만 채찍으로 두들겨 갈기는 것은 여전했다고 한다. 게다가 [[제1차 세계 대전]] 후에는 [[르완다]] - [[부룬디]] 지역을 할양받으면서 [[투치족]]과 [[후투족]]간의 [[분할통치|갈등을 조장하는 방식으로 통치했고]] 덕택에 벨기에는 후의 [[르완다 내전]]과 [[부룬디 내전]]의 원흉 중 하나로 꼽힌다.[* 그래서 르완다 내전 당시 벨기에가 군대를 보내서 강력히 조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다른 나라들에게서 이 사태 원흉이 누군데 그런 말을 하냐는 반응만 돌아왔고 결국 홀로 병력을 보냈다. 하지만 이 때만 놓고 보면 벨기에는 이웃나라 프랑스보단 나았다. 벨기에는 그래도 사태를 해결해 보려고 했던 반면 저 상황에서 프랑스는 투치족을 학살하는 후투족들에게 무기를 제공하며 분쟁을 악화시키고 있었다.] [[땡땡의 모험]] 작가인 [[에르제]]가 땡땡의 모험 시리즈 중에서 우익 사상에 빠져들었던 젊은 시절에 그린 <콩고에 간 땡땡>이 이 시절에 그린 작품이었다. 당대 벨기에 정부의 행태나 강제노동을 묘사하지 않은 채 원주민들을 문명화 교육(을 빙자한 세뇌 교육)시키며 [[코뿔소]] 등 야생동물도 잡는다는 식의 내용으로 그려졌다. 후일 작가 자신의 성향이 바뀌고 나서부터는 이 작품을 [[흑역사]]로 여기기 시작하여 인종차별주의적인 색채를 빼는 방식으로 수정했기는 했지만 원 작품 자체의 인종차별주의적 성향이 너무 강하다 보니 현재도 준 [[흑역사]]급의 작품으로 여겨지고 있다. 벨기에는 레오폴드 2세가 원하는 대로 힘 있는 국가가 되어 있었지만 콩고인들을 물론이고 벨기에 정부와 국민, 전 세계적인 여론, 그의 친구와 벨기에의 모든 정부 관료들은 그를 혐오했고 그의 아내와 3명의 딸 가운데 2명에게서도 외면받았다. 다만 그의 정부인 블랑슈 들라크루아(Blanche Delacroix)라는 여인만이 그의 편이었다. 그녀는 레오폴드 2세와의 사이에서 2명의 아들을 낳았고 레오폴드 2세는 두 아들의 출생에 기뻐했지만 벨기에 국민의 다수를 차지했던 [[가톨릭]] 신자들은 교리상 남녀의 불륜 관계에 대해서 굉장히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의 [[불륜]] 행각은 자국민들에게까지도 엄청난 혐오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불륜으로 인해 레오폴드 2세는 가톨릭 신자가 다수인 자국민들에게도 외면받았고 특히 그의 가족과 친척에게도 버림받게 되었다. 1909년 12월 초에는 [[천벌|창자까지 막히는 심각한 고통에 시달렸고, 그 어떠한 치료법이나 약도 효과가 없었다.]] 레오폴드는 자신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는 쿠린 신부를 불러서 자신의 정부 블랑슈 들라크루아와 결혼을 했다. 그리고 그녀에게 드 본 남작부인이라는 작위를 내려주었으며 많은 재산을 카롤린에게 물려주고 며칠 후에 사망했다. 블랑슈는 그의 임종을 지켰고 그가 죽자 대성통곡을 했으나, 한 사람이 레오폴드의 시신 앞에서 통곡하는 그녀를 끌어내 버렸다. 웃긴 사실은 블랑슈는 레오폴드 2세가 사망한 지 1년만에 [[재혼]]했고 레오폴드 2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을 그냥 내팽개치고 살았다는 거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olemn_Funeral_of_the_King.jpg|width=100%]] || || 레오폴드 2세의 장례식 || 죽기 1달 전, 레오폴드는 자신의 장례식을 조촐하게 치르도록 당부했다. 그는 화려한 장식이나 추모 행렬 등이 없이 간단하게 장례식이 진행되기를 바랐다. 그의 장례식에서 벌어진 일을 생각할 때, 큰 규모로 거행했다가 분노한 민중들에 의해 무슨 사태가 벌어질 지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초라한 장례식은 죽은 왕에 대한 모욕으로 보일 수 있었으며, 그의 뒤를 이어 왕위를 이은 [[조카]] 알베르와 정부가 끝까지 그를 잔인하게 대우했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가 있었기에 그의 요구를 씹고 화려한 장례식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레오폴드가 사망한 후 그를 브뤼셀에 있는 궁궐에 이틀 동안 머물게 했고 그 후에 그의 지위에 어울리는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결국 본인의 예상대로 본인을 실은 관의 행렬이 지나갈때 [[인과응보|국민들로부터 온갖 야유와 쌍욕세례를 받는 등 엄청난 경멸을 받고 땅에 묻히며 그의 서사는 마무리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